인흥마을이야기

[스크랩] 인흥마을 광거당

롬복시인 2008. 4. 28. 00:17
 

광거당 

 

 

                                        

 

 

남평문씨 세거지 맨 우측편에 자리한 광거당은 인산재 문경호(文敬鎬)가 인흥사지에 현재의 문씨 세거지를 개터한 이래 건립한 재실인 용호재를 헐고 후은 문봉성(後隱 文鳳成)과 수봉 문영박이 접객과 후손들의 강학장소로 1910년에 건립한 것이다. 광거당은 정면 4칸 반 측면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T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다. 정면과 우측면 외진주만 원기둥을 사용하여 무익공 소로수장집으로 꾸몄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우측 뒤로도 역시 온돌방 둘이 이어져 있다. 오른쪽 전면에 누(樓)는 1칸을 돌출시켰는데 누마루는 툇마루보다 한 단이 높게 구성된 점이 특이하다. 대청의 전면과 우측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으며 나머지는 쪽마루를 두었다. 광거당에서 사용된 기단과 초석은 󰡐�인흥사지(仁興寺址)󰡑�에서 가져온 것들이라 하며 목재는 춘양목으로 봉화에서 낙동강을 따라 뗏목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관리사와 솟을대문이 합해진 대문채를 들어서면 먼저 차면담이 앞을 막는다. 우리가 흔히 󰡐�내외담󰡑�이라 부르는 구조물이다. 광거당 본채가 보이지 않도록 가려주면서 광거당과 관리사의 영역을 구획한다. 담의 중심부 하단에 기왓장으로 무늬를 만들어 치장한 꽃의 형상이 있다. 당 내에는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이 지은 당의 기문과 석촌 윤용구(石邨 尹用求)가 쓴 현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과 근세 중국의 명사 장건(張蹇)등의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지금도 옛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한다.

                                                                                           


  망국의 해에 세운 광거당은 만권의 전적을 비치한 만권당 (萬卷堂)이 있어 학자들의 발길   이 끊이지 않고 참고와 토론의 전당이 되었다. 인수문고의 기반이 되는 만권당의 1차적 목적은 남평문씨들의 자녀교육이었다. 신식 교육기관<추사 김정희 편액>이 대거 설립되는 상황에서 문씨 집안에서는 일제가 세운 신식학교에 자녀들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설립한 사립학교이자 도서관이 만권당인 셈이다. 만권당의 책 가운데는 국내의 고금서적은 물론이고 당시 중국 근대의 문학대가들의 문집 등이 상당수였다. 중국의 책들을 선별해준 이가 구한말 유학자요 문장가인 창강 김택영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그가 평소 남평문씨 집안과 밀접한 교류가 있어 만권당 주인 부탁을 받고 책들을 추천했고 구입한 책들을 상해의 배편으로 보냈다한다. 문씨 집안에서는 책이 목표에 도달했다는 기별을 받고 사람을 보내 소달구지로 운반했다고 한다. 1970년, 수봉정사 내 존안각(尊安閣)을 지어 광거당과 수봉정사에 수장되고 있던 전적류를 합쳐 문중문고로 일원화 하였고 1982년 국고보조로 비좁았던 존안각을 헐고 수봉정사 옆에 있는 밭 300평에 서고 건물을 지어 인수문고로 현판 했다. 현재 인수문고에는 1,059종의 1만 여권의 서책과 목판들이 수장되어 있다. 인수문고 경내에는 주로 20세기에 간행된 한국학 중심의 책 약 5,000권을 장서하고 있는 중곡서고(中谷書庫)가 병설되어 있다. 거경서사는 인수문고를 건립할 때 같이 지은 열람과 담론의 공간으로 지은 정면3칸 겹집인 목조건물이다.


■󰡐�廣居󰡑�라 함은󰡐�맹자󰡑�‘등문공장구하󰡑�(謄文公章句下)의 󰡐�천하의 넓은 땅에 살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한다󰡑�(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에서의󰡐�광거󰡑�를 딴 것이다.


출처 : 일하는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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