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남평문씨 세거지
문익점 선생의 후손, 그들의 삶터
남평 문씨 본리세거지
영남지방은 고려말부터 중앙에 대한 새로운 인재의 공급원이어서 사족(士族)이 많이 출현하였고 이들은 출신지나 처향(妻鄕)또는 외향(外鄕)에 씨족일문의 번영을 위해 반촌(班村)을 건설하였다. 이 씨족들은 경치가 수려하고 농업생산이 많은 곳에 자리를 잡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남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우수한 건축물과 문화적 전통을 형성하였으며 이들 건축적 유구와 문화적 전통은 아직도 남아있어 건축학과 민속학연구의 좋은 대상이 되고 있다.
남평문씨 본리세거남평지는 넓은 범위에서 반촌에 속하지만 조선시대 반촌의 형성에서 볼 때 최후기인 조선말기와 일제기에 속하는 특수한 마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7세기 이후 유학의 발전, 임란, 병자난 등의 결과로 장자우선상속제도의 변화가 생겨나고 이로 인한 동성촌락이 정착되어 문중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8세기 이후 우수한 씨족들은 경제력을 향상시켜 부농층으로 불리어지고 이들이 씨족을 중심으로 군거하는데 이 마을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문씨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으며 경영형 부농층에 속하였으므로 인근의 다성(多姓)이 거주하는 일반마을에 있는 소작인들을 써서 광작농업을 하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상류층의 문화를 향유, 발전시켰으며 고급의 주택과 재실을 건축하였고, 주로 성리학의 연구에 정력을 기울였다. 문씨가 이룩한 마을은 인접한 마을과는 달리 같은 씨족의 상류층 주거지로만 발전되었기에 그 규모가 작아서 문씨세거지로 불리운다.
인흥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이다. 1975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가 대구로 편입되면서 1992년 5월 12일 대구시 민속자료3호로 재 지정된 곳이다. 대구시내에서 5번 국도를 따라 남서쪽으로 13km 달려 화원읍에 도착 후 천내천 다리 건너기 전 왼편으로 하천을 끼고 2km 남짓 호젓한 시골길을 달리다보면 나타나는 잘 보존된 전통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이르면 길 옆 오른편에 본리 1리(인흥)이 음각된 큰 자연석 표석이 서 있고, 왼편에는 동네 입구를 알리는 듯 돌을 모아 원추형으로 조성된 조산무더기가 눈에 띈다. 바로 좌측 산기슭에 수백 년 묵은 고목사이로 조선말기 영남지방 양반가옥의 틀을 지닌 건축물들과 흙돌담 골목이 인상적인 세거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본래 인흥사 절터가 있던 곳으로 문익점(1331-1400)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1812-1874)가 19세기 중엽, 새로이 터를 열어 일족의 세거를 위해 정전법에 따라 집터를 구획 정리하고 재실과 살림집, 마을 안길을 정연하게 계획하였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아 본리동 379번지를 중심으로 약 1만평이고 외곽을 합치면 전체가 2만평을 약간 넘을 정도이다. 우리 목조건물의 독특한 조형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당당한 모습의 광거당과 수봉정사, 그리고 국내에서 보기 드문 문중문고인 인수문고와 그 부속건물, 그리고 삼대소가 아홉 재택 등 열두 집의 전통와가가 즐비하게 들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빼어난 주변 경관 속에 2~3백년 묵은 소나무, 회화나무, 은행나무 등 노거수와 담 너머의 매화나무, 석류나무, 감나무 등이 잘 어울려 풍치를 한결 드높이고 있다.
특히, 곧은 안길과 흙돌담장이 이어져 외관상 전체가 하나로 보이는 것이 다른 이름 있는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무엇보다 남평문씨 세거지는 조선후기에서 근대초기에 걸쳐 성립한 일족의 세거지로 마을의 공간구성 및 근대한옥의 건축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