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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국(召文國)에 낚싯대 드리우듯 - 의성에 가다

롬복시인 2010. 3. 5. 16:34

조문국(召文國)에 낚싯대 드리우듯 - 의성에 가다

 

글: 김주명 (대구시문화해설사)

 

우메* /김 호 진

 

길에 뒹구는 조약돌 무늬에서 말의 슬픈 울음소리가 만져진다 노인이 다가와 절뚝이는 자신의 다리에 몸을 기대라고 한다 오래된 상처가 그 소리를 듣는다

 

아낙의 불길한 출산 소문이 온 동네에 번졌다 결국 동네 사람들은 엄마 배를 찢고 나온 아기와 이웃에서 곧 이어 태어난 말까지 매장해 버렸다 사람들은 그곳을 위마(位馬)라 불렀다 가뭄이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다

 

슬픈 이름에 오랜 풍화작용이 겹쳐 우메 우메하는 황소의 순한 울음소리로 불려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들이 슬픔의 흔적에 몸을 포개었을까

 

 

*우메 : 탑리오층석탑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의 작은 마을

 

 

유난히 저수지가 많은, 그래서 낚시인들이 즐겨 찾는, 낚시 채널에서 반드시 조황속보를 그때그때 전해주는 의성 권을, 이번엔 조문국(召文國) 이라는 일반인들에게는 조금은 생소한 역사의 한 면을 다룬 신문기사 몇 줄은 들고 찾아간다. 조문국(召文國)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찾은 의성의 길은 늘 같은 길이었다. 그러나 찾는 마음이 달라지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한 방울의 물도 아끼려는 조문국인(召文國人)의 마음이 저 많은 저수지를 만들었으리라 생각하며 길을 쫒는 동안 무수한 저수지 둑들이 예사롭지 않아보였다. 고인돌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조차 무척이나 낡아 보이는 것이 더 새롭다. 사방에 솟은 거대 고분들과 이곳이 그 옛날 조문국의 중심지 이였음을 쌓아 올린 탑들이 단박에 일러준다.

 

 

조문국은 어떤 나라일까?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경상도 지역을 통합하면서 정복전쟁을 벌였던 소왕국(읍성국가)의 이름이 등장한다. 김천의 감문국, 경산의 압독국, 상주의 사벌국, 청도의 이서국 등과 함께 의성의 조문국 정벌기사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벌휴니사금 2년(185년)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갈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에서 다시 한 번 이름이 등장하는데 “조문국의 옛터는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조문리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듣기위해 김종우 전 의성문화원장을 만났다. 조문국의 옛 역사복원을 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그에게 본지의 취재목적은 사실 조금 빗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의성군청의 관계자들은 의성의 특산물 정도를 알릴 수 있는 기사를 내심 원하는 것을 읽기도 했지만, 우리의 목적은 문학적 상상력이 뿌리내릴 수 있는 조문국 일 수 밖에 없음에, 혹여 점심식사라도 대접한다하면 하면 부담스러워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다행이 군의 관계자들은 갑자기 들여 닥친 탓에 책정된 돈을 걱정하며 슬그머니 자기자리로 돌아가고, 식사 이야기를 꺼낸 김종우 전 문화원장도 우리를 참 편하게 해주었다.

“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투자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과 고려, 조선 중심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고대 소왕국도 엄연히 우리의 역사임에도 소홀하게 다뤄진 게 사실이죠. 이제 소왕국의 역사를 대대적으로 규명해 우리 역사의 큰 장으로 만들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조문국은 21대 369년간 왕의 역사가 존재한 강성국가였습니다. 의성 땅에 산재한 고분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만큼 많고, 규모도 경주의 왕릉에 견주어 손색이 없습니다. 고대 의성 땅에 찬란한 역사, 문화가 꽃피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고분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발굴을 통해서도 금동관 및 의성의 고유한 토기 등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 되었다. 이를 보관, 교육과 관광의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박물관 건설을 추진 중이라고 전한다.

 

실제 전해오는 이야기들로도 조문국의 위세는 짐작 할 수 있다. 신라와의 마지막 전쟁에서 신라는 2천명의 장병으로 조문국을 공격케 했다. 조문국 왕은 금성산 주위에 석성을 구축하고 방어에 돌입했다. 조문국왕은 성을 굳게 지켜 응전하니 신라의 강함으로도 쉽게 격파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내 양식은 점점 결핍되고, 적의 형세 역시 대단했다. 이에 왕은 묘책을 세웠으니, 산에 볏짚을 쌓아 곡물을 저장한 듯 적에게 보이게 하고, 또 백토를 물에 타서 넘쳐흐르게 해 쌀 뜨물과 같이 보여 며칠을 버텼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칠일간의 격전으로 끝내 패배 하였으며, 왕과 그 장병들 모두 성안에서 장열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한다.

 

 

그 치열함의 중심이었던 금성산은 어떤 산인지 살펴보기로 했다. 금성면 어디에서라도 우뚝 솟은 금성산이 보인다. 해발 고도 530여 미터이지만 평지 한 가운데 솟아 오른 영락없는 화산의 봉우리 형태를 띠고 있다. 화산은 재앙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비옥한 토양과 여러 광물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물이 귀한 의성이 전국적 명성을 가진 마늘의 산지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마을이 다시 길을 깨우고

길은 탑에 포개어 진다

탑이 거느린 것들은 언제나 탑에 겹쳐진다

겹쳐지지 못하는 것들이

탑이 솟은 이유를 궁금해 한다

 

김호진- 시<탑이 거느린 것들>일부

 

또한 의성은 탑의 고장이기도 하다. 탑이 있는 마을 탑이 좋아 눌러 살고 있는 한 시인이 있다. 약국을 경영한지 오래된 동산약국 주인 김호진 시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또한 그의 시 속에서 금성산 일대의 풍광들이 아름답게 비춰지고 있음으로 보아 이 일대는 공룡과 고인돌의 문화 뿐 만 아니라 율도국의 희미한, 어쩌면 희미하므로 더 문학적 아련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손색없는 문화 현장으로 보존되어도 될 만큼 향기로움을 지니고 있는 고장임이 틀림없다. 또한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오층탑은 경주의 탑과는 많이 다르다. 국보 제 77호로 지정된 탑리 오층석탑, 보물 제 327호 빙산사지 오층석탑이 널리 알려져 있다. 어쩌면 많은 탑과 사찰을 지어서라도 조문국을 잃은 슬픈 마음 위로 받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지금은 절은 사라지고 탑만 남아 조문국의 깃발아래 휘날리고 있지만, 그 애잔함은 내내 떨칠 수가 없다. 대곡사의 몸돌 없이 지붕돌만 남은 다층탑이, 네모의 모양으로 순서 없이 쌓아 올린 방단형 적석탑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일까?

 

召文國/박윤배  



까마득히 잊힌 옛 부족국가 

영화로웠을 흔적을 찾지만

능의 풀들 자람 멈춘 가을에도

막바지 피는 꽃은 깃발 같다

커다란 젖통 무덤들 봉긋하여 

혹여 아직 다 식지 않은 사랑이

저 따뜻한 반원 안에 남아 있진 않을까

발굴의 호미 날 들여다보지만  

예초기에 잘려지는 꽃 대궁 진액 살피지만

적의 침공에 복속되던 순간까지

최후의 일전 치르던 사내의 함성은 없다

둥글고 높은 무덤이야

영화로웠을 순간에 만들어진 것

힘 빠진 날갯짓 장수잠자리

다가가도 쉬이 반기지 않는

원망, 치욕 빛깔로 깃발 꺾는 꽃들

슬금슬금 걷는 가을 평지가

발끝에서 또 뭉개지고 있다 

 

자연이 의성에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선물이 빙계계곡이다. 삼복에 얼음이 얼고 엄동설한에 더운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신비의 산 빙산, 이 산을 감아 도는 계곡을 빙계라 하는데 예로부터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많은 피서객들이 더위를 피해 이곳을 찾고 있다. 또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도 전하고 있으니, 얼마나 뜨거웠던 사랑이었길래, 이곳 빙계에서 조차 식지 않았단 말인가!

 

이밖에도 전통마을로 보존되어오는 사촌마을, 산운마을, 산수유 하나로 자식공부 다 시켰다는 사곡면 화전리 산수유마을에서 보는 의성의 우직함과 고집스러움은 모두 조문국(召文國)으로 그 근원이 닿아 있으리라!

많은 시인 묵객들이 고갈된 상상력을 복원하려면 이곳에 한번쯤 들러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이런 문화적 안식처가 될 만한 곳은 그리 흔하지 않다. 지방자치제로 무수히 개발되는 지역적 문화가치가 단순한 상업성이 아닌 보다 영구적이고 수준 높은 고급의 축제를 동반할 때 조문국의 옛 영화는 살아날 것이다. 단순히 희미한 역사를 복원하고 박물관을 건립하는 중심뼈대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각도에서 조문국의 정신들 유산들을 조명할 때 다시금 부활한 조문국은 제대로 부활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민관民官이 전란에 임하듯 옛 문화 부활에 힘쓴다면 조문국 이주해서 남겨진 폐허의 빈집의 저 혼자 피는 들꽃들도 어깨 으쓱해 질 것이고 이곳에 고향을 둔 외지의 의성인 들도 그 위상이 당당해 지지 않을까? 아무튼 문학과 관련된 이번 조문국 옛 땅 곳곳은 무수한 상상의 원천이 숨겨져 있어 엄청난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임을 의성에서 본다. 한 동안 머물며 낚싯대 드리우고 시를 구상하기에 이만한 고장이 또 있을까?

 

 

사진: 마리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