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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은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중이다/함성호

롬복시인 2011. 2. 4. 15:08

신은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중이다

  

            함성호

 

 

썩는다, 이 악취

오, 그리운 이 부패의 향기

신은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중이다

사랑은, 우리의 생은 확률이거나 우연일 뿐이었다

방금 무엇이 우리의 몸을 투과하며 지나갔는가

적막한 지하 역으로 거룩하게 입장하는

텅 빈 지하철은 흡사 화려한 관처럼

우리의 죽움을 종달새처럼 반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중이다

우리의 미래는 방화의 불화살로 자신을 점화시키고

그 화살과 같은 날들은

알 수 없는 미래로 날아갔다

에데노피테쿠스의 초상-나의 세포가 전인류의 역사를 추억한다

크리미아 타타르인들의 폐허와, 푸른 나뭇잎에 싼 밥을 먹는 미얀나 카렌 반군 소년 병사의 웃음

제국의 영화와, 호모사피엔스의 유적을 새긴-내 몸안의 비석

모든 진리가 쉽게 말해질 수 있다는

헛된 상상을 버린 지, 나는 이미 오래다

그대가 이른 봄 산

어둠에 만발한 진달래꽃 한 가지를 들어

나를 보였을 때

나는 한 우주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휘어진 터널의 빈 속을 빠져 나왔을 때

나는 버려지어, 빛 받은 노란 국화 꽃잎처럼

그 여자의 허벅지는 환했다

첫 울음을 울어버린 후로, 모든 것은 혼돈의 흰 강을 건너

무너진 산성에 흩어지어 핀 산수유처럼

사람들은 또 만개하지 못했다

 

 

별들도 그런 봄꽃들처럼 한 순간에 피었다가는

덧없이 유성으로 져 흐르곤 했다

그대가 나를 지나갔는가?

지난 밤에는 고래등같은 오량가에서 잠든, 나그네의 새로운 아침처럼

비로소 우리는 무덤들 가운데서 깨어나고 있다

내가 그대를 지나 왔던가 아닌가?

간밤 아름다운 꿈들도 무덤이었던 것처럼

보라, 이 아름다운 폐허!

누가 신의 놀이를 엿보는 경계 없는 어둠

어떻게 폭풍의 한 날이 우리를 불어 갔는가?

상상한다

 

 

시집"聖 타지마할" 문학과 지성1998

 

출처 : 대구 詩창작원 <수상가옥>(시인 박윤배의 집)
글쓴이 : 김상무(主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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