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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바타비아 선/시집 바타비아선

김주명 시집 해설- 몰디브에서 부른 아픈 사랑과 치유의 노래/김재구

by 롬복시인 2018. 9. 11.

해설

 

몰디브에서 부른 아픈 사랑과 치유의 노래

 

김 재 구

 

 

)들어가는 말

김주명 시인에게 있어 떠남은 한 동안 인생이고 철학이고 삶의 이상향이었다. 첫 번째 시집 인도네시아2014년도에 출판하였으니 벌써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첫 번째 시집의 시 성가신 일상, 마지막 행에서 시인은 저는 내일 아침 몰디브로 갈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고향 대구를 떠나 인도네시아 롬복에 정착한다. 그리고 소나무 이민사의 소나무처럼 살았다. 롬복에서 정착은 그의 인생에 있어 극적인 환승인 셈이다. 어느덧 5년이 지났고, 그는 몰디브에서 두 번 째 시집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몰디브는 지리적 명칭이 아니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인도네시아의 롬복은 상상 속 몰디브의 형상일지도 모른다. 그의 몸과 영혼이 한 장소를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그 곳이 그에게 있어 몰디브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두 번째 시집 바타비아Batavia 은 아이러니하게도 떠나 온 곳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못 다한 사랑 이야기를 애절하게 노래한다. 동시에 시인은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죄의식으로 서럽게 몸부림치기도 한다. 그의 온 삶이 방황하고 흔들린다. 이러한 시인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바타비아Batavia 곳곳에 잔잔한 슬픔으로 장식되어 있다. 롬복에서 새로운 삶, 그의 사랑은 더 이상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사랑이었던 전 부인과의 이별, 그리고 잃어버린 사랑은 김주명 시인의 가슴에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여전히 그의 시상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아픔과 상처는 시를 통해 재생하고 부활하여 그의 시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우리는 시를 읽을 때마다 곳곳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만나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이렇게 그의 두 번째 시집은 바로 몰디브에서 부른 아픈 사랑과 그것의 치유 과정을 노래로 엮어 놓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김주명 시인은 이번 시집 바타비아Batavia 을 통하여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의 아픈 상처를 꿰매고 치료하기도, 보듬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왜 그가 이번 시집의 제목을 바타비아Batavia 이라고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은 그에게 있어 인도네시아 말로 꼬송이 되어 버린 시인의 사랑 때문이다. 또 이국의 작은 섬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삶을 맞이하면서 인간 삶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보내고 또 답을 얻으려고 한다. 일종의 선문답이다. 물론 머리가 떨어져 나간 부처의 형상을 보면서 어쩌면 시인은 정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왔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시인은 더더욱 솟아오르는 질문들을 던져보지만, 그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굳이 찾으려 한다기보다는 질문 던지기를 통하여 일종의 수행과 선의 세계에 닿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의 두 번째 시집은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 롬복에서 그가 깨달아갔던 사랑과 인생에 대한 깊은 詩的 명상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아픈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려는 김주명 시인의 시적 경향을 맞닿게 된다. 이러한 의도는 김주명 시인의 아주 독특한 시짓기 기술인데, 그의 시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본 해설에서 흥미롭게 살펴보자. 해설자는 이를 다중의미기법이라 부르기로 한다. 즉 김주명 시인이 선택한 시어는 한 의미만을 함축하고 있지 않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이 시집의 제목이 바타비아Batavia 인데, 왜 시인은 자카르타 선이라 하지 않고 굳이 바타비아 선이라고 했을까? 바타비아Batavia와 자카르타Jakarta는 인도네시아의 수도로 그 의미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자카르타 보다는 옛 수도 이름인 바타비아가 더 이국적이고 고풍적인 이미지를 더하여 주는 다중적인 의미를 가진 시어인 것이다.

또한 그의 많은 시에는 대명사 당신이 있다. 물론 시인 본인은 그 대상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독자에게는 다중의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당신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또한 시인은 많은 시에서 의문형 문장을 자주 만든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 한다. 선문답을 걸어온다. 시인은 굳이 어떤 하나의 답만을 기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 본인도 그 답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의문형 문장은 다중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중의미기법은 그의 시 해석에도 사용이 된다. 그는 평소 생각하고 있던 사상이나 깨달음을 시의 어느 부분에 독립적으로 던져 놓는 경향이 있다. 어떤 싯구나 문장이 이웃하고 있는 행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임에도 은유적으로 이를 붙여 놓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연결 된 싯구나 문장은 그 부분만 가지고도 의미를 파생한다. 굳이 본문과 연결하며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독자들은 시 해석의 난해함을 느끼게 된다. 이 난해함은 평소 시인 자신이 이미 깨닫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시어이기 때문이다. 반면, 시와 완전히 분리시켜 그의 인생과 연결하여 읽어도 또 다른 의미로 온다. 시를 읽는 독특한 재미를 선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본 해설서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둘 것이다.

 

예를 들어 김주명 시인이 모든 것을 종합하고 아름다운 결론에 다다른 부분을 보자. 시집 바타비아Batavia의 결론은 그의 첫 시 自序의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드러난다.

 

(전략)

오래토록 바라본다는 건

진정 사랑하는 일입니다.

 

- 자서에서

 

이 싯구는 고립된 김시인의 어두운 삶 가운데 그의 무수한 선문답에 하나의 모범 답안을 가져다 준 말이다. “오래토록 바라본다는 건/진정 사랑하는 일입니다.”라는 부분을 시인의 인생과 연결하면서, 비록 사랑하는 여인은 바로 옆에 존재하지 않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그토록 그리워하고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비록 시인의 삶에 더 이상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녀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영원히 아름답게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랑을 버리고 또 얻고 하는 것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떤 현실적 상황에도 다시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처럼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까. 독자는 이 시집의 후반부에서 롬복에서 마음을 다 잡고 밝은 새 삶을 시작하는 김주명 시인의 모습을 흥미롭게 만날 수 있다.

 

)몸말

그의 두 번째 시집, 1부에서 우리는 김주명 시인의 선 세계를 접할 수 있다. 시인은 인도네시아의 여러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명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선문답을 하며 인생의 의미를 알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의미의 순서로는 잃어버린 사랑과 황당한 인생의 심로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이야기인 2부가 먼저 오고, 여행을 하며 그 방황의 의미와 답을 찾으려 하는 1부가 뒤 따라오는 것이 의미의 순서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꼭 그렇게만 해석할 여지를 독자에게 주지 않고 의미를 다중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주기 위해 순서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먼저 그가 시집의 제목으로 가져온 표제시 바타비아 선을 보자.

 

카페 바타비아 앞 광장

꼼짝도 않는 광대, 피터팬

 

살아 있는 내내

묵언의 수행

 

누군가 왔다

누군가 떠나가는

스스로의 고립

 

관객이 모두 사라지면

스스로 풀리는

 

생의 형벌

 

- 바타비아 전문

 

이 시의 제목에서 이라는 언어가 시사 하듯이 김주명 시인에게 있어 삶이란 어쩌면 무언가를 깨닫기 위해 도를 닦는 과정이다. 그는 이 시집을 통틀어서 세 가지의 질문을 한다. 왜 그가 사랑을 했는지, 그런데 왜 그 사랑을 떠났는지, 또 무슨 인연으로 롬복에서 살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이다. 물론 시집 안에는 무수히 다른 질문으로 나타나지만 위의 세 가지로 그의 모든 질문을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지독한 방황을 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 길 떠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바타비아 선이 탄생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인용시에서 1연과 2연까지는 의미가 무리 없이 흘러간다. 이미지도 무난하고 시어에 대한 이해도 전혀 어렵지가 않다. 하지만 3연부터 시가 갑자기 난해하여 진다. “누군가 왔다/누군가 떠나가는/스스로의 고립이 시어들도 앞선 시어들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시가 난해하여 진다. 이를테면, 누군가 왔다가 누군가 떠나가는데 왜 그것이 스스로의 고립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앞 말과 의미 연결이 안 되는 것 같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시어 같이 시 전체와 잘 안 어울리는 장식물 같게도 보인다. 시인은 왜 이 시어를 여기다 나열하였는지, 무슨 의미를 의도하였는지 해석이 힘들어 진다. 이럴 때 이 시어를 독립시켜 그가 떠나왔던 고국과 그가 자초한 인도네시아에서의 고립된 삶을 떠올리면 이해가 아주 간단해 진다.

 

이런 방식으로 표제시 바타비아 선뿐만 아니라 다른 시들을 읽어나가면 시를 읽는 재미가 아주 쏠쏠해진다. 몰론 독자가 김주명 시인의 삶을 모르면 이렇게 연결시킬 수 없는 난해함이 있지만, 조금이라도 그의 연애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릎을 치게 된다. “스스로의 고립을 실제로 롬복에서 고립되어 살고 있는 시인의 삶과 연관지어 이해를 한 후, 다시 마지막 연의 생의 형벌과 연관을 지으면 이 마지막 연의 해석도 어렵지 않게 된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을 떠나 온 시인은, 어쩌면 그 여인에 대하여 죄의식까지 느끼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 그가 겪는 고립된 인생의 질고를 시인은 어쩌면 하늘이 준 생의 형벌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난해했던 부분을 작가의 인생과 연결하여 독립적으로 해석을 하면 이해가 될 여지가 생긴다. 시인 자신도 사실 이런 관계를 의식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다. 무의식적으로 시어를 나열하고 있지만 그것이 해설자에게, 혹은 그를 잘 아는 독자들에게는 그의 무의식의 세계가 보다 더 그의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마치 장기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수를 더 잘 보듯이 아주 쉽게 읽힐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시어를 설명하여주는 다중의미기법이다.

 

해설자도 김주명 시인의 인생사를 2018년 봄에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롬복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무수한 그의 연애사를 엿듣는 계기였다. 그리고 그 첫날 밤, 그는 오래된 기타를 하나 집어 들고 마치 피를 토하듯이 노래를 한 곡 불렀다.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였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놀란 점은 그가 아주 긴 노래 가사를 다 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미 들려 준 사랑과 이별 이야기와 연결 되면서 더욱 더 그의 노래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은 그의 전 부인일까? 그녀는 아직도 고국에 있는 사람이다. 김주명 시인은 그 사람을 못 잊는다기보다 그녀와 나누었던 그 아름답고 뜨겁고 가슴 아팠던 사랑을 못 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 아름다운 사랑의 흔적이 그의 시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시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겪어 본 사람에게는 그런 시어들의 깊이가 쉬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알면 김주명 시인의 이번 시집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시인의 삶과 연관된 시어들은 순다의 노래2, “뱃길 내내 품고 왔던 원죄原罪같은 짐/햇살 검게 그을린 사내들 어깨를 빌려/내려놓는다에서 원죄 같은 짐이 가지고 있는 메타포의 원관념에서 알 수가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온 사실이 시인 자신에게는 원죄처럼 씻을 수 없고, 쉽게 없어지지 않는 짐처럼 그의 삶을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면 워노소보 행13행부터 5행까지가 자연스레 이해가 된다. “언제쯤 나도 저리 편히 누울 수 있을까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배낭하나 채우는 일이기도 하겠다 두고 온 짐들이 뒷덜미를 더 무겁게 한다는 걸,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나?” 이 부분도 굳이 전체 시와 엮어서 해석을 하려면 다소 난해하여 진다. 연결이 잘 안되고 암호 풀이를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서 그의 잃어버린 삶과 연관 시키면 아주 읽기가 쉬어 진다. 그는 떠남의 간편함을 이야기 한다. 그렇지만 떠남은 훌쩍 마음대로 되겠지만 언제나 뒤에 두고 온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인생의 짐이 되어 뒷덜미를 아주 무겁게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고 왔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시 선문답이다.

 

김주명 시의 다중의미기법과 의문형 문장은 서로 연결이 된다. 그의 시 가운데에는 의문형 문장이 곳곳에서 출몰한다. 거의 습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철학적인 관조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그의 생활 습성하고도 연관이 있다. 늘 인생의 답을 향하여 애절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부처에게도 묻고, 예수에게도 묻고, 무수한 질문들을 누군가에게 던지며 살아 왔던 것이다. 그의 질문들에서 독자는 그의 내면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모시르12연에서 이런 표현을 보자.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 제대로 못했고.그 후회의 날들.빗나간 삶의 화살.” 시인은 무의식적으로 이 글을 썼겠지만, 우리는 확연히 이 표현으로 그의 내적 심적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 제대로 못하고 지금까지 흘러온 그의 삶은 아마도 빗나간 삶의 화살이라는 메타포로 감동적인 시적 표현이 된 것이다. 시인의 무의식의 세계가 이 부분에서 과거로 순간 이동을 하여 이 시어들을 이쯤에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워노소보 행23-4행에서도 나타난다. “여전히 나는 비탈길에 걸린 알지 못하는 소리를 붙들고 있다떠나는 왔어도 삶은 여전히 비탈길에 서 있는 것 같고 위태롭다. 아직 많은 말들을 듣고 읽고 해봐도 인생의 답은 찾을 수 없었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워노소보 행4」의 마지막 행에 자신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이국을 떠도는 게스트 (Guest)’ , 손님이라 표현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겠다.

 

브로모 상22연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깨달음의 경계 같은 난간을 붙들고 있다 여기까지 가져온 동굴에서의 욕망이 발목을 부여잡지만이라는 표현에서 점차 무언가 인생의 의미가 알뜻 말뜻해 지고 있던 시인이 또 다시 수행에 가까운 인생의 의문에 대한 답 찾기를 볼 수 있다.

보로부두로 단1」에서 시인의 내적 고민을 좀 더 들여다보자. 2연의 3행을 보면 여기까지가 전생이고 저기까지가 현생이다 한 바퀴를 돌아도 현생이 전생이다앞선 시행과 연결을 시켜도 되고 사실,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먼저 붙여서 의미를 만들면 보로부두로 단을 실제로 한 바퀴 돌면서 벽면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구조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수미산이라는 시어를 들여와서 이생과 전생을 나누는 이미지를 선행하는 지식으로 알고 둘러보지만, 실제적으로 그림의 어디까지가 전생이고 어디까지가 현생인지 구분을 잘 못한다는 의미가 서려있다. 동시에 이 부분에서 시인의 인생에 대한 묵상도 읽혀진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삶이 이후 다음 생의 전생이 되어 다시 태어날지, 혹은 이미 어떤 나쁜 전생이 있어서 지금 자신이 이렇게 고통스런 현생을 살고 있는지, 현생이 전생 같고 전생이 현생 같아 잘 모르겠다는 현실적 고민도 읽혀지고 있다.

그러나 보로부두르 단2에서 시인은 부처에게서 어떤 답을 찾으려던 자신이 받은 충격을 이렇게 묘사한다. 1연을 보자 머리가 없는 부처 앞에서/나는 말을 잃어 버렸다그리고 3연이다. “뜨거워진 설법 탓일까/남겨진 빈 생수 페트병/찌그려 졌거나 밟혔거나/뚜껑이 없거나 또는/상표가 없는”, 이 표현 또한 다중의미기법으로 설명이 된다. 실제로 목이 떨어져 나간 부처의 모습이 찌그러진 페트병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측은함을 느끼는 시어로 의미 해석이 가능하다. 동시에 인간의 죽음과 연결하여 시인의 생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한 무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그의 죽음은 마치 다 마시고 버려져 밟히고 찌그려진 페트 물병 같은 이미지인 것이다. 죽은 상태와 다르지 않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메타포이다. 시인의 의식 세계 내부에 늘 존재하고 있었던 죽음의 그늘에 대한 두려움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처에게서도 어떤 답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방황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다.

 

이와 비슷한 메타포는 사모시르22연에서도 이렇게 보인다. “나도 살아 버틸 수 있다고 적도 한가운데 걸린 침엽수림/위로 빗방울은 쪼개지고 또 쪼개지기를 억 만 번/먼 생의 종착점을 알기라도 한 듯시인은 자신의 삶의 최후까지도 바라보고 있다. 이는 같은 시 4연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이때 쯤 생의 모서리에 묶인 끈을 좀 놓아도 되겠지지독한 생의 고립과 죄의식으로 점철된 그의 삶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죄 값을 죽음으로 받아야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시인의 무의식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한 동안은 인생의 극단을 치닫고 있었던 그의 어두웠던 인생살이를 엿보게 된다.

그래서 낀따마니 혈1행에서 조등弔燈 같은 별빛이 켜지면시인은 자신의 인생에 또 다시 조등을 켠다. 죽음의 메타포다. 같은 시 마지막 연에는 가라앉지 않는 당신, 그림자/총총한 별빛에 떠밀려/물결의 층계를 밟고 있다에서 그의 죽음의 이미지 배후에 존재하는 당신을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고국에 두고 왔던 사랑했던 여인에 대하여 죽음만큼이나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 싯구들이다. 2, 하루의 뒷부분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한 번의 순종이거나/한 번의 순교/한 번의 꿈이라고. 그의 죽음의 메타포를 종교적인 순교의 이미지와도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2부의 첫 시인 꼬송kosong은 위의 생각을 잘 뒷받침하여 준다.

이제까지

있다 없으면 이곳에선

꼬송이라 한다

 

사실, 꼬송은 비었다는 뜻이다

비어있다는 공의 철학이 바다 건너 먼저 왔을 수도

내 주머니도 텅 빌 때가 많으니

꼬송이 맞겠다, 그럼

 

채워지기 전까지도 꼬송이 될 수 있겠네

 

그렇다면 나는

갑자기 정전이 된 오늘 밤처럼

당신과의 느닷없는 이별을

텅 빈 기다림

 

'꼬송'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 꼬송kosong전문

 

이 시의 뒷부분에 나열되어 있는 싯구들이 강렬하다. 특히 당신과의 느닷없는 이별을/텅 빈 기다림/ '꼬송'이라 부르기로 하겠다는 여전히 그의 마음 한 가운데 절절히 사랑했던 전 부인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꼬송인 체로 무수한 시간을 홀로 롬복에서 견디었던 작가의 고독하고 힘들었던 무의식의 세계가 멈칫 보이는 부분이다. 역시 다중의미기법으로 의미 해석을 해야 하는 부분이다. 시인에게 있어 당신의 이미지는 중독中毒의 마지막 두 연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이모티콘 안에서 늘 웃고 있는/크레바스를 닮은 그녀/입술”, 즉 갈라진 입술로 피곤해 보이지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에서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남국의 너무 달빛 밝은 어제는/두고 온 그대 생각/날선 빛으로 뚫고 나올까그리고 소리공양供養에서 그녀와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전략)

내가 당신에게 다가 설 때

심장 뛰는 소리마저 민망했는데

마치 저들은 모르는 듯

나를 젖게 하고 있다

 

이 소리를 모두 모아 사랑이라 적어두자

곧 있으면 당신이 깨어날 시간

 

- 소리공양供養에서

 

심장 뛰는 소리마저 쑥스럽고 가슴 떨렸던 첫 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엿보이는 시다. 그리고 먼 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대를 돌아선 지 얼마였던가요?/이제 먼 산을 돌아서면/나의 배경이 되어 줄까요, 마치 그대처럼?/ 오늘은 그대가 먼 산입니다시인의 내부에서 또 아이를 틀고 앉아 있는 그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아주 깊고 굵게 읽혀지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번제燔祭의 첫 행에서 시인은 사랑에도 쓸모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비닐봉지를 줍다가처음 깨닫기 시작한다. 같은 시의 마지막 행에서는 사랑을 들이키다 울컥한 기억도/가볍게 날아간다라는 표현으로 보아 시인은 격정적이었던 사랑과 그 연인과 아픈 기억들조차 날아가는 텅 빈 비닐봉지에 담아 날려 보낸다. 그런 그녀와 사랑의 관계를 다음 요가에 대한 짧은 보고서에서 시인이 어떻게 정리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마디와 마디사이

간극을 늘이는 게

요가의 수련법이다, 마치

당신과 나 사이 존재했었던

종합선물세트 같은 감정을 부풀게 한 다음

둘 사이를 멀게 한다

 

그렇게 서로를 단련시키는 것이다

 

너무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요가는 선이 되기도 한다

실핏줄 같은 선들을 타고 

전두엽까지 도달한 통증은

깊은 강물처럼

내 마음을 몰고 다니기도

 

이때쯤 요가를 사랑이라 하자

통풍인 듯

스치기만 해도 아픈

그렇게 아프지 않는 사랑이 없듯

둘 사이 이는 바람이 잠잠해지나 싶으면 어느새

요가는 벌려놓는다

 

나를 단련시키고 있다

 

- 요가에 대한 짧은 보고서전문

 

어떤 해설도 필요 없이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시다. “당신과 나 사이 존재했었던/종합선물세트 같은 감정을 부풀게 한 다음/둘 사이를 멀게 한다시인에게 있어 당신으로 표현되어지는 그녀와의 사랑은 마치 여러 가지 맛을 다양하게 느낄 수 있었던 종합선물 세트였던 것이다. 그런 사랑과 헤어지고 난 다음 지금도 그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시인의 내면을 바라보게 된다. 4연에서 그렇게 아프지 않는 사랑이 없듯이라고 표현하고 이를 마지막 연에서 단련이라 쓴다. 사랑의 아픔만큼 자신이 성숙해 감을 느끼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요가에서 독자들은 시인이 점차 그리워했던 여인과의 오랜 기다림과 아픔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기 시작함을 엿보게 된다. 마지막 두 연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제 놓아야 할 때임을 직감한다

차마 놓지 못하는 내가

은사시나무 떨리듯 서걱일 때 쯤

요가는 입 닫고

 

창 닫고 만다

 

- 바다요가에서

 

시인은 이제 그렇게 질긴 인연과 사랑을 놓아야 할 때라고 독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 스타카토에서는 이런 심정을 사라지는 미학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당신의 빈자리 찾아 더듬는 일/풀 같은 미련을 키우는 일이라고/딱 이슬만큼/풀이 자란다라고 표현하면서. 그렇다. 오래 전 고국에서 사랑했던 여인을 떠난 것은 어쩌면 사라짐의 미학일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의 빈자리 찾아 더듬는 일은 시인에게 있어 어쩌면 이미 떠나 버린 임을 다시 찾으려 하는 풀 같은 미련일 수 있다. 풀은 세상에서 가장 값이 없고 가치 없는 존재라고 가정했을 때, 지금 새롭게 롬복에서 보금자리를 만들었고 가정을 꾸린 이상 당신의 빈자리를 계속, 아무도 몰래 찾는 일은 무가치한 일일 수 있다.

 

행복은 어떻게 찾아오는가?에서 시인은 진지하게 참된 행복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같은 시 10행에서 시인은 차라리 수행修行에 가깝겠다라고 말한다. 그리면서도 또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당신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게/또 없었나?” 그녀와 연관하여 삶을 살아가는 한 자신에게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 들기 시작하는 시인의 내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폭自爆이라는 시의 마지막 행에서, 인생 별거 없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게 전부다무언가 인생과 사랑이란 것에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 워노소보 행5」에서 시인은 롬복에서 새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나도 모르는 시간에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였고

 

내가

나도 모르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덜컥

주저앉아 버렸답니다

 

- 워노소보 행5」 에서

 

롬복에서의 새로운 인연, 지금의 아내와 새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새로운 인생으로 잠시나마 그의 생의 울음은 멈춰질 수 있었다. 그리고 3부에서 시인은 롬복의 꼬빵(Kopang) 마을의 새로운 삶과 함께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한 명, 한 명 묘사를 하면서 생의 소설을 써내려가듯 보여준다.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었어요!’라고 하는 시인의 마음을 보여 주는 시들이 많이 쓰여 있다. 그 중에서 수파르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한다

금식을 안 지키는 것은 물론

늘 브럼을 달고 다니며

돌 같은 직구로 남의 일에 간섭하니

그와 마주치면 밤길도 움찔!

 

말레이시아에서도 살았고 수마트라에서도 살았다

그때마다 아내와 아이가 있었고 지금은

혼자서 자유하고 있다, 일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이 대충 하는 일은 그냥 못 본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멀어졌다

수군거리며 멀어졌다

 

요즘 그가 하는 일이라곤

오른쪽 가슴에 일찍 핀 꽃 문신을 지우는 일이다

늘 자랑으로 달고 다니던

검고 탄력 있는 가슴 꽃을

지금은 돌로 빡빡 문지르며 칼로 긁어내고 있다

꽃잎이 한 잎 두 잎 사라진 자리에는 찔끔 게워내는 눈물도

이 꽃이 모두 지면

결혼을 약속한 그녀가 오기로 했다고 한다

그때는 가슴 속에 꽃을 피울 것이다

 

아프지도 않다 한다 그래서

사랑은 아프지 않을 것이다

 

- 2. 수파르 전문

 

수파르의 삶을 보면서 아마도 시인은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살았고 수마트라에서도 살았다/그때마다 아내와 아이가 있었고 지금은/혼자서 자유하고 있다, 일도 하지 않는다/그래도 남이 대충 하는 일은 그냥 못 본다고국에서 가정을 꾸리며 살다 롬복에서 정착하여 잘 생긴 아들도 한 명 낳고 멋지게 살고 있는 시인의 가정사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수파르가 보이는 문신을 지우고 있다면, 시인은 마음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던 어두운 과거가 새 삶을 위해 지워야할 문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생 가운데 새롭게 결혼을 약속한 그녀가 오기로 했기때문이다. 마지막 행에서 더 이상 사랑 때문에 아파하지 않을 희망도 보인다. <수파르-마지막회>에서 시인은 이렇게 묘사한다. “사랑이 세상을 변하게 하는지/사랑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지/사랑을 사랑해 본 사람은 알리라무언가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는 시인 자신을 노래하고 있다.

 

본 시집 4부의 파꽃2연에서 시인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다. “사실, 나는 파꽃을 좋아한다/이방의 비탈에 그늘을 일궈 사는 내게 돌멩이란 흔한 일상, 하지만/한바탕의 우기는 세상을 초록으로 뒤집어 놓고/떠나 올 때 기억처럼 단단해진 돌만 남겨놓았다우기 때 비는 정말 견디기 힘든 존재이지만 우기가 끝나면 초록의 새로운 생명들을 만들어 낸다. 그는 단단한 돌멩이 같던 떠나올 때의 마음이 어느새 세파에 깎이고 다듬어진 돌이 되어버린 시인 자신의 자화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 심우도3에서 울음소리 간혹 들릴 때 마다 당겨지는 목줄/아직 팽팽하다라며 이제 롬복에서 소 키우는 일로 생계 문제도 해결하며 희망에 차 살아가고 있는 시인의 삶을, 건강하여 쉬 죽지 않고 목줄 팽팽한 어린 송아지를 빗대어서 묘사하고 있다.

 

) 나가는 말

김주명 시인의 깨달음과 시집 바타비아Batavia의 결론은 그의 첫 시 自序에서 알토란처럼 잘 그려져 있다.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떠오르는 해를 오래, 아주 오래 바라다보면

발리, 낀따마니 호수의 고요 속으로 빨려들기도

브로모 화산의 숨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보로부두루 사원의 머리 없는 부처님 위로

해는 떠올랐습니다.

 

제가 사는 린자니산 칼날의 능선 위에도

햇살은 거침없이 퍼져 나갑니다.

밀림의 초록 그늘을 찾아

햇살을 잠시 피해보기도 하지만

떠오르는 해는 저를 포기하는 법 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래토록 바라본다는 건

진정 사랑하는 일입니다.

 

- 自序전문

 

이 시의 첫 연에서 시인은 말한다,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제 고통과 가슴 아픈 이별의 심로를 거쳐 그의 인생에서 떠오르는 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치열한 선문답의 끝에 그는 마음속에서 밝게 떠오르는 해를 깨달음과 기쁨의 은유(메타포)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해는 보로부두루르 사원의 머리 없는 부처님 위로/해는 떠올랐습니다.”라고 절정을 이룬다. 비록 머리 없는 부처님 위라는 싯구는 어떤 메타포도 생각하지 않고 즉, 의미를 부여 하지 않고 읽어도 무난하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면 다소 난해하고 시의 본문과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하여야 하는 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그의 다중의미기법에 의지하여 따로 이 부분만 분리하여 이해하면 된다. 시인이 표현하듯이 스스로 잃어버린 머리를 찾아 올 수 없는 돌부처는 어쩌면 자신의 질문에 원래부터 답을 줄 수 없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애꿎은 돌부처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음을 시인은 깨달은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내부에서 오랫동안 지독한 고민과 번민을 겪으며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터득하여 버린 것이다. 머리 없는 부처님 위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은 시인의 인생의 또 다른 전환기를 가리키는 단단한 메타포인 것이다.

 

다시 말해 김주명 시인이 인생에서 해와 같은 해답을 하나 얻었다면, 이는 마지막 연에 쓰여 있다. “오래토록 바라본다는 건/진정 사랑하는 일입니다.”라는 구절에서 발견되어 진다. 비록 사랑하는 여인은 떠나고 없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그토록 그리워하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비록 그녀는 내 옆에 물리적으로 함께 생물적 사랑을 나누고 있지 않아도 이렇게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는 그 사실이, 바로 그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끝이 난 것 이라기보다는 보다 더 거룩한 사랑으로 승화되고 영원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이 시는 마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연상하게 하는 시이기도 하다. “님은 갔지만 님은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내부에서 진정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비록 오랜 시간이지만 그에게 있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듯이 그녀를 멀리서라도 계속 바라보고 있다. 밝은 해 같이 떠오르는 밝은 그녀의 얼굴과 진정한 사랑을 자신의 내부에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 롬복에서 마음을 다 잡고 새 삶을 시작하자며 인생의 작은 결론에 다다른 시인의 모습을 우리는 이 시집에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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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재구 박사는 뉴욕, 롱아일랜드대학에서 영문학을,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시나르마스 국제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이며, 한국문협 인도네시아지부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