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영남일보에 실린 기사 전문입니다.
심재(深齋) 조긍섭 선생을 모셨던 정산서당(鼎山書堂) 유허비(遺墟碑) 제막식이 (7월) 5일 오전 11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버스정류장 부근)에서 이종진 달성군수와 문희갑 전 대구시장, 조후승 정산서당 유허비 건립회장, 지역 유림, 창녕 조씨 문중 인사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1873년 경남 창녕의 고암 원촌리에서 태어난 심재 선생은 퇴계 학통을 이어 받은 최근세 조선유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꼽히고 있다. 유허비가 건립된 정대리는 심재 선생이 1914년에 은거해 정산서당을 세웠으며, 이곳에서 10여년동안20세기 한국유학계를 이끈 학자를 비롯한 200여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정산서당은 안타깝게도 광복 후의 혼란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됐다. 이에 최근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을 중심으로 심재 선생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면서 후학과 문인 후예, 조씨 문중 등이 함께 뜻을 모아 유허비를 건립하게 됐다.
조후승 유허비 건립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정산서당이 이름만 남기기에는 너무나 모자람이 많아 유허비를 세워 선생의 학문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지료로 삼기로 했다"고 밝혔다.
鼎山書堂 遺墟碑文
이곳 亭垈는 韓末의 巨儒 深齊 曺兢燮 先生이 講學한 鼎山書堂이 있던 곳이다. 先生은 一八七三年 慶南 昌寧의 高巖 元村里에서 태어나 일찍이 嚴親인 素履齊 曺炳義 公으로부터 薰陶와 家學을 익히고 二十歲를 前後하여 當世의 儒宗 俛宇 郭鐘錫, 晩求 李種杞 四未軒 張福樞와 西山 金興洛諸先生을 차례로 찾아 問學하면서 學問의 地平을 넓혔다.
선생은 타고난 英明으로 十代에 이미 能通諸經大義하고 卓然成自一家라 이를 만큼 어느 특정한 學脈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나 크게는 退溪學統에 그 淵源을 두고 있다. 이후 선생은 自靖 속에서 오로지 德性을 涵養하고 學問에 精進하여 通涉과 會通을 통해 道學과 文章을 아우르는 大家를 이루었다. 또한 總 四十一卷에 달하는 文集을 남겼으며 最近世 朝鮮儒學을 代表하는 한 분으로 손꼽히고 있다. 先生은 十九世紀 후반부터 한 百年 混沌과 亡國의 歷史 속에서 때로는 憂國의 哀情을 드러내기도 하였고, 嶺南 儒林이 主動한 巴里長書事件을 비롯하여 日本 總督과 同胞 大衆에게 보내는 글을 起草하는 등 日帝에 抗拒하다가 拘禁되어 苦楚를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끝내는 깊은 산골에 숨어 草衣木食으로 사는 것이 부끄러움을 지키는 선비의 길이라 여기고 찾아든 곳이 琵瑟山 北麓에 있는 鼎山이다. 당시만 해도 이곳 亭垈는 사람의 來往이 드문 아주 깊은 산중의 寒村이었으며, 隱遁守志로 聖賢이 남긴 道學을 익히고 繼承해 가기에 適合한 곳이기도 했다. 先生은 一九一四年 四十二歲에 이곳에 隱居했으며 알고 찾아오는 수많은 弟子들을 위해 四年 뒤인 一九一八年에 鼎山書堂을 開設하였고, 그 후 十一年동안 그 名聲은 斯文一脈 在大山長谷으로 널리 알려졌다.
鄕里에서부터 一家를 이룬 先生은 交友關係도 그 폭이 대단히 廣範하다. 晦峯 河謙鎭과 偶齊 李觀厚, 無聞軒 李澈厚 裕齊 楊鐘樂 伊山 孔錫圭 등 南道의 많은 學者들과 交遊했고, 특히 亭垈에 들어와서는 嶝 하나 넘어 達城 仁興에 있는 萬卷의 典籍을 갖춘 廣居堂을 中心으로 主人인 壽峯 文永樸과 함께 百愧 禹夏九, 茶谷 李基魯, 近齊 鄭之純, 素巖 金鉉東 등 域內의 學者들과 자주 어울려 學問과 談論으로 友誼가 깊었고, 李大山의 決訟場補와 吳藥山, 朴晩醒의 文集 등 소중한 資料의 刊行에도 함께 參與했다. 뿐만 아니라 蘭谷 李建芳, 彛庭 卞鼎相을 비롯해서 嶺南을 찾아온 畿湖의 여러 碩學들과의 從遊와 凔江 金澤榮, 梅泉 黃玹 등 國內外의 이름난 文士들과의 交通이나 直間接의 交流가 잦았으며 이 분들이 남긴 글에서도 先生의 學問의 깊이와 名望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敎學을 통한 선생의 영향은 참으로 至大했다. 金在華, 李元敎, 李秉灝, 成純永, 朴紀鉉, 河性在, 曺圭喆, 文普采를 비롯해서 心喪三年을 지킨 弟子가 百名에 이르렀고 모두 百八十名이 넘는 文人들이 記錄되고 있다. 이들은 京鄕各地에 두루퍼져 深齊學問과 精神의 脈을 이어 왔고, 그 가운데는 二十世紀 韓國儒學界에 이름을 남긴 錚錚한 분들도 적지 않으며 이들의 대부분이 鼎山書堂을 거쳐 나왔다. 先生은 鼎山 十五年後 玄風 雙溪에 龜溪書堂을 새로 열어 講所를 삼았고, 一九三三年 그 곳에서 別世하였다. 당시 東亞日報는 朝鮮이 낳은 碩學, 漢學界의 泰斗 深齊先生 長逝하는 哀悼의 記事를 남겼다.
이후 日帝末의 苦難과 解放後의 混亂 그리고 兵燹 등 연이은 時騷로 鼎山, 龜溪 두 書堂은 애석하게도 지키지 못했으며, 一九五四年에야 文人들이 鄕里 元村에 德巖書堂을 세워 先生을 推仰하며 享祀를 받들고 있다. 그동안 學界에서도 몇 편의 硏究論文이 나왔으나 去年에 비로소 後學들이 深齊硏究會를 만들어 慶北大學校의 嶺南文化硏究院과 함께 深齊學術大會를 開催하여 綜合的인 照明을 했으며 앞으로 持續的인 硏鑽을 통해 선생의 학문을 深化發展시켜 나가자는 氣運을 열었다.
그러나 옛 書堂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어 後學과 文人, 後裔 및 曺氏門中이 뜻을 모아 先生의 얼이 깃든 鼎山 이곳에 碑를 세워 遺德을 기리고 그 精神을 綿綿히 이어나가는 徵表로 삼고자 한다.
二00七年 十月
南平 文熙膺 謹撰
昌寧 曺廷純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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