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에 대한 끝없는 사랑
-지장보살(地藏菩薩)의 눈물
대구 팔공산 동화사 가는 길로 백안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우측 편에 방짜유기전시관을 가리키는 표지판과 함께 ‘북지장사’라고 새겨진 큰 돌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관심 있는 분들은 팔공산의 반대편, 달성군 가창 녹동서원을 지나면 남지장사도 있다고 귀 뜸해 준다. 사찰 이름으로 지장보살이 쓰일 정도니 무언가 이야기가 있을 법도 하며, 북지장사와 남지장사가 어떤 연유로 대구의 북쪽과 남쪽에 자리 하게 되었을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없으며, 효행이 극진한 한 선비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을 뿐이다.
그럼 사찰의 이름은 어디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필자가 살펴 본 바로는 사찰의 이름에는 무척이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으며 나아가 시대의 사회상이나 역사성 또한 고스란히 담아내고 이었다. 불교의 이미지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가장 불교적인 이름으로 불국사(佛國寺)나 해인사(海印寺)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는 동화사(桐華寺)나 파계사(把溪寺) 같이 풍수지리설과 도교적 배경에서 이름을 따온 경우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유교적 배경에서 나온 이름도 있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는 달성 화원의 인흥사(仁興寺)가 대표적인 경우로 들 수 있다.
또 지역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인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특히 왕건과 관련해서는 팔공산 인근에 많은 지명뿐만 아니라 팔공산 남쪽의 대덕산에 있는 사찰에도 그 이름을 남겼으니, 왕건이 숨어 정세를 살폈다는 은적사(隱跡寺), 편안히 쉬어건 곳이라 해서 안일사(安逸寺), 이곳에 와서 쉬어 간데서 연유된 임휴사(臨休寺)가 있다.
사찰이름에 나타난 북지장사의 지장보살은 어떤 분인지 알아보자. 지장보살 (地藏菩薩, ksitigarbha)은 먼 과거 생(生)에서 수행자의 길을 걸으실 때에 끝없이 많은 중생들이 알 수 없는 죄업(罪業 전생에 지은 죄는 기억하지 못함)으로 극심한 지옥의 고통과 지옥에 나와서는 짐승의 몸으로 태어나기도 하여 끝없는 고통을 받는 것을 아시고 서원(誓願 부처님 앞에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맹서)을 세우게 되는데 그 내용은 지옥에 중생들이 모두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서 성불하기 전에는 나는 성불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서를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서원을 하신 관계로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드시고 다음 미래불인 미륵불이 오실 때 까지 중생의 구원을 담당하고 계신 지장보살은 지금도 지옥에서 중생들을 보살피시는 모습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중생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는 지장보살이 어떻게 초기 불교 전파과정에서 대구지역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이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신라의 대구통합과정을 알아보자. 신라(경주세력)가 대구지역을 완전히 복속시킨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주로 6세기 전후로 해서 경주에서 직접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성을 중심으로 한 달벌국, 화원의 성산고분세력, 경산의 압독국 등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관련기사들은 신라의 대구통합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구와 인근지역의 완전한 통합과 민심을 안정시키기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강한 통치력과 더불어 이를 따를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불교가 신라에 공인된 시기는 삼국 중 가장 늦은 6세기 중엽 법흥왕 때이며 팔공산에 지장사가 건립된 시기는 이보다 훨씬 빠른 신라 소지왕 7년(485년) 극달화상에 의해 세웠다고 전하니, 차이나는 이 시간 동안 신라의 중앙정부는 대구지역의 이반된 민심을 안정시키고 보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강한 군사력보다는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 틀을 사용했음이 분명해 진다.
그러면서도 종교가 가지는 추상적인 개념과 실천 윤리보다는 백성들의 삶에서 가장 가까이 있으며 끊임없이 중생을 계도하고 구제하는 지장보살이야 말로 통합과정의 혼란한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민중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 들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마치 입증이라도 하듯, 통일 후 신라의 신문왕은 대구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웠으며 비슬산 자락 지금의 가창 우록리에 684년(신문왕4) 또 다른 지장사를 양개조사(良介祖師)를 통해 건립했으니, 당시 민중들의 지상보살에 대한 신앙이 지극했음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겠다. 지금은 북지장사와 남지장사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으며, 사찰의 규모도 작아지고 찾는 이도 많지 않은 것이 오히려 천오백년 고찰의 위용을 실감 할 수 있다.
북지장사를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대웅전 주련의 글귀가 마음을 놓아 주질 않는다.
莫言地藏得閑遊: 지장보살님이 한가히 노닌다 말하지 말라
막언지장득한유
南方敎化幾時休: 남방화주(南方化主)#의 교화는 언제나 끝이 날까?
남방교화기시휴
造惡人多修善少: 악인은 많아지고 선업 닦는 이 적으니
조악인다수선소
地獄門前淚不收: 지옥 문전에서 (지장보살은) 눈물 거두지 못 하네!
지옥문전누불수
'나는 언제 한 번 다른 사람의 고통과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는가?'
1. #남방화주(南方化主): 남방(南方)에서 중생(衆生)을 교화(敎化) 인도(引導)하는 주인(主人)이라는 뜻으로 '지장(地藏) 보살(菩薩)'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진: 대구이야기님
대웅전 뒤쪽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수 십 년 전 폭우로 인해 발견되어 지금은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이 보살상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다.
지금의 대구 동촌에 효행이 극진하고 덕과 부를 겸비한 류정선이라는 처사가 살고 있었다. 처사는 풍수대가의 추천으로 지금의 대웅전(옛 지장전)자리를 아버지의 묘터로 점지해 놓았다. 후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묘터를 파헤치니 땅속에 사람모양과 흡사한 돌덩이 하나가 나타났다. 모두가 이상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상주인 류정선 처사 앞에 흰 소복을 한 미인 스님 한 분 나타나서 “나는 지장보살이다. 이 자리는 묘지가 아니다. 이곳에 절을 지어 많은 중생을 계도하여 참된 효자가 되어라” 하고는 사라졌다. 마침 인근의 팔공산 인봉에서 고행수도를 하고 있던 극달화상의 간곡한 설법으로 아버지의 매장을 단념하고 화장하였다. 처사는 바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그 자리에 절을 세운 뒤, 사람모양의 돌덩이를 지장보살상으로 조각하여 모시고 절 이름을 지장사라고 하였다.
옮긴이의 생각: 이야기의 전개방식이 효를 중요시하는 것과, 문화류씨들의 대구 이주과정 등을 살펴 볼 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듯하여 신라시대 사찰 지장사의 건립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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