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만다라
나희덕
시간은 酸性이다.
아현호프 뒷골목 재래식 화장실에 가보라.
거기 앉아 서럽게 오줌을 누고 있으면
시간이 오래 삭혀낸 무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술꾼들이 함부로 갈기고 간 오줌기와
빗물이 들이치고 간 자리마다 허물허물 피어나는
붉은 꽃, 부서져내리는 꽃,
화장실 함석문에 피어난 만다라를,
깨진 전등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쏟아낸 똥과 오줌은
바닥에 닿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끝내 부식되지 않는 시멘트벽의 고요보다는
저 끓어오르는 오물의 냄새가,
녹슨 함석 문짝을 열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저 신발 끄는 소리가 오늘밤은 더 좋다.
시간은 신발 뒤축을 낡게 하면서
스스로도 신발을 끌고 황망히 사라지고 있으니,
그의 뒷모습을 보려거든
아현호프 뒷골목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 가보라.
녹슨 만다라 앞에 쭈그려 앉으면
오체투지로 그려낸 붉은 꽃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나희덕 시집 사라진 손바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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