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는 꽃들이
마른 논바닥을 헤집고 일어선 씨멘트 길을 따라 걸으면 누나의 집은 늘 맥주병을 둘러
꽃밭을 만들고 채송화, 맨드라미며 알 수 없는 이름의 꽃이 피곤 했다 양철대문의 우체통은
녹이 슬어 뜯어보지 못한 수십통의 먼지가 쌓여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던 누나의 집 마당에 한참 서 있었던 것은 보라색 슬리퍼 사이 꽃잎같이
삐져나온 누나의 발꿈치 때문만은 아니었고 겨울 가뭄은 하얗게 바람을 몰고 와 빨랫줄을 흔들자
담벼락에 기댄 해바라기의 얼굴에서 주근깨가 쏟아질 듯
어려서 부터 말이 없는 조카들은 내 손만 잡고 따라왔다 동네 가게에서 삼백원이나 오백원짜리 과자를
사주어도 웃지 않고 흙담벽에 그려놓은 새들이 날아오르자 맞춤법이 틀린 아이처럼 나무들이 일어서고
그 뒤로 하늘이 또 일어서고
매형은 매형대로 위로를 해주고 나는 나대로 생각을 넘겨짚고 마루에서 담배를 피우면 찬 공기가 옷섶을 들
추며 온기를 빼앗고 가져온 것 없어도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느라 작은 수첩처럼 접힌 하늘에 금방 사라질
입김을 날려보냈다
이불을 덮고 누워 나지막한 천장에 눈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가뭄을 먹고 더 싱싱하게 자라는 별빛의 소리에
귀를 열어두기도 하고 집으로 갈 생각에 기름병이며 마늘을 싸줄 것이 걱정되어 어둠속에서 나는 몇번씩 몸을
뒤척였다 늦은 저녁 설거지를 마친 누나가 옆에 눕자 나는 말없이 돌아누워 누나의 나이를 세어보았다
-김성규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
김성규 (1977년 생)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로 등단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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