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를 사랑하는 사람들
1. 헤리
그는 못하는 게 없다
쌀, 담배 농사는 기본이고
땅이 가만 쉬는 걸 보질 못한다
낚시도 그만이다
나랑 꼭 같은 대나무 낚싯대지만
붕어만한 고기를 잘도 낚는다
이곳에선 ‘닐라’라 부른다
아랍어 경전도 곧잘 읽어 내린다
결혼도 했다
조숙한 아내와 한 살배기 아들
요즘 헤리가 더 바빠졌다
세 들어 사는 집이 팔렸다며
집을 짓고 있다
집을 짓고 있다고?
귀퉁이 돌아서는 땅에다
방 두 개, 거실 한 개
쉬었다 하지, 커피 한 잔 하쇼
오늘은 헤리가 가슴이 아프다며
담배 있소?
오전에 야자나무에 올랐는데
나무를 세게 껴안는 바람에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했다
담배 연기 뭉게 피어오른다
헤리는 그렇게 사랑할 것이다
2. 수파르
사람들은 그를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한다
금식을 안 지키는 것은 물론
늘 브럼blum*을 달고 다니며
돌 같은 직구로 남의 일에 간섭하니
그와 마주치면 밤길도 움찔!
말레이시아에서도 살았고 수마트라에서도 살았다
그때마다 아내와 아이가 있었고 지금은
혼자서 자유하고 있다, 일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이 대충 하는 일은 그냥 못 본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멀어졌다
수군거리며 멀어졌다
요즘 그가 하는 일이라곤
오른쪽 가슴에 일찍 핀 꽃 문신을 지우는 일이다
늘 자랑으로 달고 다니던
검고 탄력 있는 가슴 꽃을
지금은 돌로 빡빡 문지르며 칼로 긁어내고 있다
꽃잎이 한 잎 두 잎 사라진 자리에는 찔끔 게워내는 눈물도
이 꽃이 모두 지면
결혼을 약속한 그녀가 오기로 했다고 한다
그때는 가슴 속에 꽃을 피울 것이다
아프지도 않다 한다 그래서
사랑은 아프지 않을 것이다
*브럼blum : 쌀과 야자열매 수액을 발효시켜 만든 인도네시아 롬복의 민속주, 막걸리와 비슷하다.
3. 젠
살면서 내 손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손재주가 남다른 '젠'을 찾는다
우선 이발 기술이 탁월하다
흔한 문방구 가위 하나로
주변에 널린 무성한 생을 단번에 정리해버린다
조각은 거의 예술의 수준이다
당구 큐대도 직접 만들어 내기 게임으로 밤을 새는데
저러다 사랑은 언제나 할까
단단한 벽돌도 특별한 그의 마사지에 맥 못 춘다
기타 연주도 프로급이다
에릭 크렙튼의 ‘티어즈 인 해븐’이 흘러나오면
젠이다
결혼도 했는데
십 년도 더 됐다는데
아직 아이가 없다
손에는 자신이 있지만
이는 ‘손’만의 문제는 아니겠다
지난 해였다 어느 밤,
큐대도 기타도 내버리고
채 열흘도 안 된 피투성이 하나를 덥석 안고 나타났다
옆 동네 어느 처녀의 애라는 소문만 돌 뿐
아무도 묻지 않았다
요즘
젠의 손이 더 바빠졌다
4. 디안
그녀는 말띠 처녀 같다
우렁찬 목소리며 날렵한 몸매로
온 동네 일을 퍼다 날랐다
동네 사람들도 그녀를 제일 좋아했다
우리가 모르는 은근한 비밀도 달고 다니니
어떤 날은 야자나무도 깜짝 놀라 그만,
끌라빠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넉 달 전, 결혼도 미리 했다
웬 건장한 청년이 농사일 도우려 왔다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길로 줄곧 나처럼 처가살이하고 있다
아들이 없는 디안의 아버지는 좋았겠지만
줄줄이 달린 바나나는 벌써부터 웅성거렸다
남십자성이 모두 모인 그날 밤은 무척 길었다
별들이 서로 부딪치는지
디안의 목소리는 좀처럼 잠들지 않았고
목줄 묶인 송아지도 덩달아 날밤 새웠다
나도 별들의 언어에 귀 쫑긋
그날 이후 디안은 문 닫고 입 닫고 말았다
새신랑도 늘 일만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마을에는 또 잔치가 벌어졌고
오늘은 디안이 내 옆에 앉았다
신랑은 어디 갔냐고 물으니
눈만 말똥말똥 말이 없다
돈 벌러 갔다며 발리에
다음 달이면 온다고
지나가던 구름이 귀띔해준다
다음 달이면 정말 오냐?
그제야 디안이 빙긋이 웃었다
옹기종기 모인 파파야도 웃었다
그때부터 사랑은
파파야 같은 늘 푸른 기다림이 되었다고 한다
5. 수파르, 속편
‘잉카’라는 열 살 소녀가 있다
수파르가 아버지다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올 때 함께 왔다고 한다
하지만 둘은 같이 살지 않는다
수파르는 자유하고 잉카는 장모님이랑 산다
장모님이 수파르의 이모가 되니 나랑도 엮이게 생겼다
잉카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잉카’를 부른다
잉카, 빗자루
잉카, 재떨이
잉카, 잉카, 잉카…….
그래서 잉카는 총알을 탄 소녀가 되었다
오늘만 수파르가 신이 났다
남들은 안 입는 정장 차림이다
문신을 다 지웠나?
용꼴란의 들썩거리는 음악에
람바다와 곱사춤을 섞은 듯한 춤사위로 무희舞姬들을 웃겼다
동네가 한바탕 웃었다
수파르를 좋아하게 생겼다
나도 웃었고
바나나 나무도 너무 웃는 바람에 줄기가 꺾였다
잉카 혼자 엉엉 울었다
저녁도 안 먹고 엉엉 울었다
밤새 엉엉 울었다
잉카의 아버지는 수파르가 맞다!
6. 아만다
아직 돌도 안 된 갓난아이
내가 지어준 이름이다
‘아만’은 평화이니 ‘아만다’는 모두 평화롭겠다
아만다의 엄마는 장모님의 둘째 딸이고
아빠는 수원역에서 처제 사진을 내게 보여줬으니
나랑은 둘도 없는 동서지간이 될 뻔했는데
둘은 작년에 이혼했다
만삭인 처형이 코흘리개 아들마저 데리고 친정으로 와버렸다
여기까지가 이혼이고
남편이 다시 데려가면 결혼이 된다 하는데
아만다까지 태어났는데
데려가지도 않았고
따라나서지도 않았다
아만다는 눈이 참 크다
엉덩이에 푸른 반점도 있다
피부도 뽀얗고 볼도 탱글탱글한 게 금복주 모델감이다
한국 사람을 빼닮았다고
길 나서던 오리 가족이 한마디 거든다
그런가?
잘 찐 잎담배 한 움큼 들고서 헤리가 찾아왔다
오랜만이다
담배가 꼭 노오란 탱자 빛이다
올해 담배 맛은 어떨까
벌써 군침이 도는데
담배를 잘게 잘게 썰면서
더 잘게 썰어야 된다며
기다리다 지친 망가나무 꾸벅
잠깐 졸았다 싶었는데 차창 너머로
늘 푸른 고향 남산이 휙 지나갔다
상수리인가 자작이었던가
아차, 싶었는데
하얗게
하얗게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