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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관련 글모음

중생으로 향하는 마애불

by 롬복시인 2007. 9. 15.

중생으로 향하는 마애불


 팔공산 동화사 예전 길로 일주문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일주문을 2,30여 미터 남겨놓고 우측 큰 암벽에 방금 하늘에서 구름타고 내려오신 모습으로 마애불이 모셔져 있다. 마애불이란 자연 암벽에 조각한 불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여기에 있는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은 현재 보물 제 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통일 신라 말 흥덕왕 7년(832년) 동화사를 중창한 심지대사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 마애불 앞을 지날 때 마다 문득문득 몇 가지 의구심이 드는데,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하필이면 왜 저리 높고 큰 돌에 불상을 조각할까? 그리고 당연히 부처님 상은 존엄하기에 사찰영내의 제일 안쪽에 위치하여 금강역사나 사천왕의 호위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절 맨 입구에서 전각이나 호위 상도 없이 그것도 일주문 바깥, 세속의 세계에서 홀로 계시는지 궁금해  진다.

 그 답을 찾기에 앞서, 불상이 위치한 암벽을 살펴보자. 저 거대한 암벽, 돌은 우리 고대사회에서 인간과 밀접한 관계임이 거석문화와 암각화로 잘 나타나 있다. 거석문화란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고인돌과 선돌로 대표 할 수 있으며 암각화는 바위 위에 동심원이나 기하학적 문양을 새긴 것으로 큰 돌이나 고인돌 주위에서 발견되곤 한다. 요즘도 팔공산 골짜기 계곡의 큰 바위 앞에서 촛불을 밝히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고대사회는 어떠했을까? 온갖 자연재해와 맹수의 위협 속에서 늘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거대한 돌에 대하여 인간이 신앙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그 위에다 어떤 형상화 된 모습을 새기고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비해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 자연에서 살기 위한 운명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신앙심은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점차 산신을 섬기는 형태로 변화되었으며 더 나아가 천신을 숭배하는 신앙으로 옮겨 가는 모습을 팔공산 제천단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신라의 영역 다섯 방위에 오악을 두어 오악신으로 하여금 영토를 지키게끔 하였으니 동으로는 토함산, 서쪽으로는 계룡산을, 남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태백산,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중악인 공산, 즉 팔공산을 두어 가장 신령스러운 영산으로 여기며 돌로써 제천단을 쌓아 산 위의 신, 즉 천신에게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듯 왕과 온 백성이 신령 시 하는 팔공산에 신라 헌강왕의 왕자로써 온갖 부귀와 권세를 다 버리고 15세의 나이로 홀연히 출가한 심지스님에 의해 동화사는 다시 한 번 크게 중창되었다. 이는 석가모니와 비슷한 신분배경에서 출가를 하여 불교에 귀의한 것이 마치 석가모니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심지가 출가 할 즈음의 통일신라는 신문왕 때 대구로 천도하고자 시도하였으나 경주 귀족세력의 반대로 무산 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천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심지는 중악의 땅인 팔공산과 대구 일대에다 또 하나의 불국토를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닐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심지는 속리산에 있는 영심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해 받아 과증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속리산으로 찾아 갔으나, 이미 기일이 늦어 법회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래서 자리를 깔고 뜰에 엎드려 대중과 함께 예불하고 참회 했는데, 7일이 지나자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으나 그가 있는 땅 사방 10여척에는 눈발이 흩날리면서도 쌓이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 신기함을 보고 그가 법당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그는 병을 핑계 삼아 법당을 향하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 법회가 끝나고 팔공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옷자락에 불골간자 2개가 끼여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가지고 영심에게 돌아가 사실을 고하니 영심이 답하기를 “간자는 함 속에 있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느냐”하고 함을 열어보니 간자는 없었다. 영심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면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깊이 간직하였으나 심지가 다시 길을 나섰을 때 처음처럼 옷에 끼여 있었으므로 다시 돌아와 고하니 영심은 “부처의 뜻은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받들고 가시게.” 하며 심지에게 간자를 전수했다. 심지가 팔공산에 돌아오니 산신이 산위에서 심지를 맞아들이고, 산신의 도움을 받아 간자를 받아들이니 이가 바로 동화사다 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산신이 그를 맞이했다는 것과 산신이 동화사 중창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 이전의 이 지역에 있어 왔던 민족 신앙이 자연스럽게 불교와 융합하였다는 대목으로도 볼 수가 있으며, 이에 심지는 자신이 부처가 계신 법당 안으로 못 들어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중생들의 위한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쉽게,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지 않는 부처님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산신의 도움으로 천신의 자리에 새롭게 선 부처님은 더 이상 왕과 귀족들만의 전유물인 전각안의 부처님이 아니라, 중생들을 위한 부처님, 한 걸음 세상 밖으로 나온 부처님, 바로 여기 마애불로 오신 것이다. 마애불은 내가 힘들거나 오고 싶을 때 언제나 올 수 있고, 아무런 방해도 없이 내 고통의 소리를 들어 줄 수 있는,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부처님이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목 어귀 큰 바위 위에, 사찰 경내가 아닌 일주문 밖 속세의 땅에, 돌에 대한 신앙심을 늘 가지고 있던 그 곳에, 막 하늘에서 내려온 듯 한 모습으로 구름위에 살포시 앉아 계신 것이다.

  

그 옛날 소원 빌던 그 자리 마애불로 오시어

천 년 전에도 후에도 변함없는 그 모습으로

다난한 중생들 마음 극락세계로 인도하소서.

 

http://blog.daum.net/ilmut/1414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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