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언제나 착불로 온다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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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회사 울타리 벚꽃 피고 진다 어떤 꽃잎 피어날 때 어떤 꽃잎 지고 있다 늙은 왕벚나무가 꽃들의 물류창고 같다 사랑은 언제나 착불로 온다 꽃들은 갑자기 왕벚나무를 찾아와 빈손을 벌리고, 집 없는 나는 꽃피는 당신을 만나야 한다 꽃잎은 끊임없이 억겁의 물류창고를 빠져나가고, 사월의 허공이 태초의 발송지로 반송되는 꽃잎들로 인해 부산하다 택배회사 울타리에 늙은 왕벚나무가 서 있다. 가축 전염병으로 소와 돼지 수백만 마리가 산 채로 땅속에 묻히는 아수라 속에서도 봄은 온다. 파릇한 것들이 대지의 거죽을 밀고 올라온다. 때는 봄이고, 왕벚나무 가지에 벚꽃은 피고 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흰 벚꽃 잎들은 떨어져 내리는데, 마치 폭설을 쏟아붓는 것만 같다. 택배회사 울타리 아래 땅에는 흰 꽃잎들이 쌓였겠다. 그 벚꽃 폭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시인은 늙은 왕벚나무를 “꽃들의 물류창고”라고 상상한다. 시인은 왕벚나무 아래에 서서 언젠가 저를 떠나버린 애인을, 그 아픈 사랑의 기억을 반추한다. 아마도 그는 너무 젊어서 모든 사랑이 과도한 열정 때문에 끝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욕망의 과도함이고, 욕망의 과도함은 충족이 된 뒤에 ‘밋밋한 습관’으로 떨어지고 결국 종말을 부른다. 그래서 “사랑은 반드시 끝나기 마련이며, 게다가 아름다움보다 더 빨리, 따라서 자연보다 더 빨리 끝난다.”(니클라스 루만, 《열정으로서의 사랑》)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랑은 더 빨리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어떤 사랑은 지난겨울에 시작되었다가 벚꽃이 질 무렵 끝난다. 사랑은 구원 없는 종교! 그게 끝난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날마다 사랑을 향해 달려가 몸을 던져 오체투지하는 것이다. 사랑이 길어지는 것은 저항이나 방해 따위로 인해 그 충족이 한없이 지연될 때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사랑의 과도함이 충족으로 이어지기 전에 죽음으로써 그 사랑은 영원한 지속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욕망 충족의 영원한 유예 조건이다. 결혼은 어떨까. 그것은 사랑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반대다. 결혼을 지속시키는 동력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식어버린 뒤에도 그 사랑을 이어가야만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이다. 대개의 사랑은 끝난 뒤에 더 길게 이어진다. 사랑은 그것에 대한 추억이나 회상들 속에서만 생생해진다. 유행가와 영화에 그 많은 자양분을 대어주는 것은 지속되는 사랑이 아니라 깨진 사랑들이다. 그 많은 가수와 작곡가와 기획사들은 깨진 사랑의 마음들에 기생해서 살아간다. 많은 사랑을 다룬 유행가와 영화들은 감정 경제의 시장이 만든 파생 상품들이다. 그것들은 실연이 언젠가는 보상받으리라는 낭만적 환상들을 판다. 깨진 사랑에게서 유산을 상속받는 것은 “내 마음”이다.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 정작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 내 마음이었다 / 안녕이라고 말하던 / 당신의 일 분이 / 내겐 한 시간 같았다고 / 말하고 싶지 않았다 / 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 날 알아볼 수 없으리라 / 늙고 지친 사랑 / 이 빠진 턱 우물거리며 / 폐지 같은 기억들 / 차곡차곡 저녁 살강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 하필, /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만나 / 사랑을 하고 / 한 시절 / 지지 않는 얼룩처럼 / 불편하게 살다가 / 어느 순간 / 울게 되었듯이, / 밤의 정전 같은 / 이별은 그렇게 / 느닷없이 찾아온다”(〈사랑의 물리학〉) “내 마음” 속에는 안녕이라고 말하고 떠난 사람이 남아 있다. 그 사랑은 깨졌고, 더는 과도함도, 충족도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깨진 사랑을 방부처리해서 시간에 의한 소멸을 유예시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나’는 늙지만, 젊은 어느 시절에 정지된 사랑은 여전히 파릇한 젊음 속에서 빛난다. 늙고 지친 사랑! 그 사랑은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옛날같이 사랑의 불꽃이 점화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을 잃은 뒤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나무토막 같은 / 청춘을 살았다”(〈숯가마 앞에서〉). 그는 “숯으로 변한 나는 / 불같은 사랑을 / 두려워하면서도 / 마음 한구석 / 불씨를 숨기고 살아간다”(〈숯가마 앞에서〉). 숯을 꺼낸 불가마는 비었다고 해서 금방 식지 않는다. “숯을 꺼낸 빈 가마는 / 여전히 뜨겁다”(〈숯가마 앞에서〉).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사랑의 불길이 있던 자리가 금방 차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덥히는 것은 사랑의 기억들이다. 다시 때는 봄이다. 우연찮게 택배회사 울타리에 늙은 왕벚나무가 서 있다. 벚꽃은 만개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은 날린다. 〈꽃 택배〉에서 시의 화자는 사랑을 잃고, 삭막한 청춘을 보낸 뒤 욕망의 밋밋함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늙은 왕벚나무가 피운 벚꽃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더워진 참이다. 더워진 마음의 한가운데로 “사랑은 언제나 착불로 온다”는 생각이 스민다. 사랑은 착불이다. 사랑에 드는 비용은 돈으로 환산되는 비용과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감정비용 두 가지다. 더 큰 지출은 앞엣것보다 뒤엣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사랑에서 파생된 비용 지출을 감당하는 것은 사랑만이 우리를 습관의 밋밋함, 그 권태와 무의미함에서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자, 보라. 사월의 시리도록 푸른 허공에는 왕벚나무 가지에서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벚꽃 잎들로 분분하다. 흰 꽃잎들이 낙화하는 것은 “억겁의 물류창고”에서 “태초의 발송지로 / 반송되는” 중이다. 반송되는 것들의 목록은 꽤 길다. 우리의 사랑과 인연들, 그리고 생명들도 그 목록에 있다. 우리는 지금 저 “억겁의 물류창고”에 잘못 배달되었다가 다시 태초의 발송지로 반송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출처 : 대구 詩창작원 <수상가옥>(시인 박윤배의 집)
글쓴이 : 이 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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