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가을 서정시학 신인상 – 이언주,
보이저 1호 외 2편
이언주
덜컹거리며 33년을 달렸습니다
보이죠, 은빛 반짝이는 보이저 1호
은하는 이제 막 범람하기 시작하였고
마음 밖 문을 열던 바람 방향이 바뀌었는지
별의 빛들은 일제히 눈을 감았습니다
돌아오라,는 손짓 기다리며 여기까지 달렸습니다
종일 장대비가 내려 길은 아득하였고
유탄처럼 날리는 낙뢰를 피해 불 꺼진 행성
처마 밑이라도 잠시 서 있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싸준 가슴뼈 한 조각을 꺼내
편지를 썼지만 떠나온 별의 주소가 비에 번져
부칠 수 없었습니다
귓가에 심어둔 음악이 뭉그러지고
달아올랐던 눈이 말라 돌아갈 길은 보이지도 않고
자꾸만 더 먼 길을 재촉하는 보이저 1호
정거장도 없는 깜깜한 밤길에
보이죠? 징검다리처럼 뛰어 건너는 별들이
관성으로만 떠돌다 낯선 중력에라도 걸리면
거기가 시원의 푸른 별이라 말하면서
안녕, 그래도 연료가 바닥나는 순간까지
당신 기억의 속도로 흘러가겠습니다
*보이저1호는 태양계 바깥쪽 거대 행성을 탐사하기 위해 1977년 발사됐다. 처음부터 돌아오지 않도록 설계된 보이저 1호는 태양계를 벗어난 뒤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 조우할 경우를 대비해 베토벤 음악 등 외계인들에게 보내는 지구인의 메시지도 싣고 있다.
바위의 마음
비밀을 말하기 위해 너는 거기 서 있고 너를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여기 서 있다 달처럼 부푼 배를 가진 너는 올 때마다 품에서 꺼낸 방울이 되지 못한 눈물을 심었다 숨구멍마다 들어 찬 너를 천천히 삼켰다 아무 말도 새어나오지 않도록
무엇이 사라진 줄 모르고 있는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 먼 구름 속에서 느린 속도로 자란 비가 걸어왔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고 빗방울은 새의 부리처럼 재잘거렸다 젖은 발자국 소리에 깨어난 알몸들이 기어 다녔다 어둠 속 구멍 근질거리던 눈 먼 벌레 때문에 고약처럼 붙인 욕망을 하나씩 떼어보고 싶었다 재채기 하는 순간 공기 속으로 튀어나간 애벌레가 소문이 될까 두려워 발을 모두 잘랐다 틈이라고는 없는 내 속에 몸을 불리는 너의 기억들
너는 벽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 가슴에 귀를 한번 기울여보라 했다 그러나 나는 태초에 바위여서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벽처럼 서 있던 소문의 발목이 허물어졌다
구멍 없는 내게로 너는 이제 오지 않았고
나는 빗소리로 운다
황포강*에서
동창루 마토우(碼頭)에서
그를 기다린다
내일을 건설하러 오겠다던 김산,
뒷머리 짧게 깎아 올린 아나키스트인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약속한 사람이 오지 않을 때에는
오지 못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기다림이란,
잊혀 진 기억에 대한
치명적 자기 연민
체의 시대는 가고 배가 들어오자
줄이 무너진다
밟힌 물고기 배를 튀어나오는 알처럼
수많은 게바라들이 갑판 위로 쏟아진다
100년이 지나도 배 삯은 5마오
중국인과 개는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 뽑아 던지는 사이
혁명은 끝이 났다
동방명주 도서관에서 대출기한 넘긴
실패한 꼬뮨의 자술서 읽던 네온 불빛
썩은 강물 위로 피곤한 몸을 누인다
윤곽 흐린 달이 주춤거리고
불길한 앞날을 생각하며 포옹하는 연인들
물비린내 나는 짐수레에 밀려
선창 구석으로 비켜선 야윈 청년과
그의 염소를 바라다본다
염소 목줄 바투 잡은
더벅머리 청년의 검은 눈망울 속에서
쓸쓸한 혁명의 노후를 읽는다
마천루 빌딩들이 멀미 게워내는
그들이 발 디딘 곳이 절벽이다
사람들은 다시 혁명을
만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짜이지엔(再見), 젖은 손을 꺼내 흔든다
<이언주 약력>
대구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사이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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